탈장소화의 역사와 알레고리
탈장소화의 역사와 알레고리
곽영빈
미술비평가/ 예술매체학자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객원교수
장영원은 자신의 작업을 “주변”이라는 키워드로 요약하곤 한다. 이러한 궤적은 통상적인 전월세 계약기간에 따라 2년마다 거주지를 옮겨야 했던 경험에 기반한 초기작 <희미한 교차 Goodbye/Welcome>(2015)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가 찍어 그러모은 표지 판들은 대략 100에서 200미터 정도의 간격을 유지하지만, 그가 살았던 삶의 ‘장소’가 아 닌 ‘행정구역’을 표시할 뿐이다. 이는 분명한 사실이지만, 역설적으로 의아한 것이기도 하다. 왜 그는 자신이 살았던 ‘삶의 장소’를 찍지 않았던 것일까? 이러한 의문은 건설 현 장에서 발생하는 기계 마찰음과 타설음, 파쇄되어 사라지는 마을 소리 등을 수집한 뒤 이러 한 청각적 요소와 “닮은” 오브제를 만들어 각기 다른 시차 속에 움직이도록 만들었던 설 치 작업인 <테세락의 정원>(2015)에서도 제기된다. 철과 나무, 아두이노를 활용한 제어판과 모터로 움직이는 천들은 지극히 추상적으로 제시될 뿐 그 어떤 구체적인 감각을 시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의문은 가령 <PLATFORM-FLATHOME>(2016)처럼 사람이 등장하는 작업에서 해소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5분 남짓한 이 오디오비주얼 작업은 혼자서 투수와 타자, 수비를 겸하는 한 남성을 보여주는데, 이 말도 안되는 게임의 함의는 그것이 은평 뉴타운을 배경으로 삼송과 지축 신도시 건설 전 원주민들이 쫓겨난 자리에서 벌어진다는 사실을 통해 드러난다. 즉 그는 구체적인 개인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알레고리인 것인데, 이는 좀 전에 제 기했던 질문에 대한 부분적인 힌트를 제공한다. 만약 장영원의 작업에서 ‘구체적인 개인’ 이 등장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개인을 ‘구체적인 개인’으로 빚어내는 ‘장소’가 실질적 으로 작동하지 않기 떄문인 것이다. 독일의 사회학자인 하르트무트 로자는 우리가 살고 있 는 시대를 ‘가속사회(accelerated society)’라 규정한 바 있는데, 이를 그는 “가속사회에서 사물은 수리되지 않는다”는 관찰을 통해 설명한다. 1) 물론 수리되는 사물은 여전히 있다. 하지만 그가 ‘가속화’된다고 보는 ‘경향’의 차원에서 대부분의 사물은 수리되기보다 손쉽게 ‘대체’된다. 이는 해당 사물이나 장소에 대한 사람들의 ‘애착(attachment)’을 느슨 하게 하거나 무화시키는 경향을 강화한다. 고장나면 버리거나 새것으로 교체하면 될 것을 누가 굳이 시간을 들여 고치고 기운단 말인가? 이는 해당 객체들의 소멸이나 대체에 대한 우리의 감정적 반응이 왜 약화되는지, 나아가 이 과정에서 흐른 시간에 대한 주체의 기억과 감각이 왜 ‘정처(定處)’없이 떠도는지를 설명해준다. 분명히 시간은 흐르고 삶이 이어지긴 하나 이들은 ‘누적’되거나 스며들지 않고 증발, 또는 소멸해버리기 떄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그가 ‘폐허’에 주목했던 것은 놀랍지 않다. 가령 <오브젝트_붕 괴>(2018)는 관광지화를 염두에 두고 곤돌라가 설치되기 직전의 공간에 설치되었는데, 그는 이를 “죽음으로부터 잠시 유예된 곳”으로 인식했다. 하지만 해당 작품이 미 2사단 캠프그 리브스 장교숙소에 설치되었다는 사실은 이러한 ‘폐허’의 역사성을 보다 구체화하면서 두텁게 만든다. ‘장소’를 ‘공간’, 혹은 마르크 오제가 말했던 의미에서 ‘비장소(non-place)’로 탈각시키는 가속사회의 낙진을 수거한 것이라 할 수 있을 이 작업은 “곧 다가올 공간의 죽 음을 함께 하는 대형 설치 작업”이다. 하지만 여기서 ‘죽음’은 미군이 실지로 언젠가는 이 땅을 떠나야만 하는 ‘주둔군’이라는 의미 뿐 아니라, 그것이 ‘군대’라는 죽음을 전제로하는 단체의 공간이라는 사실에 대한 암시를 통해 보다 역사적으로 구체화되는 것이다.
대개 ‘미군부대’를 매개로 활성화되는 이 미묘한 간극을 통해 이 시기 이후의 작업은 구분된다. 가령 철원 노동 당사의 기둥을 거꾸로 뒤집은 뒤 그 윗면에 파쇄된 실제 폐허 조각 일부를 얹었던 <오브젝트_기둥>이나, 도심에서 종종 눈에 띄긴 하지만 주목을 끌지는 않는 시멘트로 만든 대전차 장애물들을 다룬 <The Object>(2021) 같은 작업 등이 대표적 이다. <가공공간>(2021) 역시 의정부에 있는 미군기지인 캠프스탠리 주변, 특히 예전 이른바 ‘환락가’였던 곳을 다룬다는 점에서는 같은 그룹으로 묶일 수 있을텐데, 이 작업의 영문 제목이 ‘Remodeling Space’라는 사실은 ‘장소’를 ‘비장소’화하는 것으로서의 ‘공간’을 말 그 대로의 의미에서 ‘리모델링’한다는 의미로 읽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시기의 작업들은 동시에 또 다른 시차에 대한 감각을 통해 중첩된다. 가령 <가공공간>은 위의 ‘환락가’를 예술 공간으로 리모델링하는 과정을 담지만, 해당 공간 의 역사에 대해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고 무관심하게 일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은, 일반인들이 보기에 시멘트 덩어리에 불과한 ‘물체(the object)’를 귀중한 유물이나 과학실험의 표본처럼 다루는 흰 옷입은 인물들의 진중함(<The Object>)과 간극을 만드는 것이다. <NORMAL>(2021)이나 <당신이 ON할 때 흐르는(Please, turn on)>(2022)과 같은 최근작들이, 하나의 벽을 축으로 명확하게 분리된 두 공간을 보여주거나 미세하게 구분되는 서로 다른 공간의 감각을 2채널로 분리했던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장파리 모험>(2019)도 미군부대가 철수하면서 슬럼화가 진행된 파주의 장파리를 다룬다는 점에서는 이 시기의 작업과 비슷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방문해야 할 지점들을 제외하면, 온라인으로 모집한 세 명의 여대생들이 작가의 동행과 구체적인 지시 없이 떠난 짧은 브이로그 (Vlog) 여행기처럼 만들어진 이 작업은 이렇게 분리된 관조의 감각을 ‘여행’의 양식으로 번역했다는 차원에서 읽어야만 한다.
이러한 궤적들을 염두에 두면, 최근 영등포에서 열린 ‘시간과 이야기’ 전시에 그가 선보인 신작들이 갖는 연속성과 차이가 보다 선명하게 들어온다. 가령 <물 밑에서 천천히>(2024)는 얼핏 버스 정류장 근처에서 볼 수 있는 의자처럼 보인다. 하지만 검은 테두리의 철제와 흰색으로 처리된 오브제를 보면, 주황과 적색 사이에 걸친 미세한 흔적들이 보인다. 이는 ‘녹’인데, 바로 옆에 비치된 분무기를 가지고 물을 뿌려 쇠가 반응한 결과물이다. 이것의 함의는 대체 무엇일까? 위에서 우리가 살펴본 ‘폐허’들이 전월세 계약이나 미군부 대처럼 초개인적인 역사적 산물의 효과였다면, 여기서 우리는 ‘폐허’를 능동적으로 만들어내는 주체로 재정의된다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는 ‘물 밑에서 천천히’라는 제목이 시사하는 이른바 ‘자연스러움’과는 철저하게 대척점에 놓이는 성격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번 전시의 야심작이라 할 수 있을 것은 <타협의 유토피아>다. 결론의 일부를 선취하면, 이 작업은 야심적인만큼 아쉬움이 혼재하는데 역설적으로 그렇기 때 문에 이후의 작업이 취할 수 있는 방향과 벡터를 시사하는 중요한 지표로 보인다.
수직으로 놓인 3미터 정도되는 스크린은 위아래가 분리되어 있는데, 위에는 건축도 면과 같은 자잘한 도표와 그래프들이 늘어났다 줄었다는 반복하고, 아래에서는 나이테를 닮 은 동그란 동심원들이 촘촘하게 보인다. 더 자세히 듣고 보면 후자는 레이더에 가까운데, 이 작업은 서울의 여의도라는 공간에 누적된 역사를 추상적인 도표와 사운드로 번역하려는 시도다. 여기서 여의도는 ‘이산가족 상봉’ 프로그램이 펼쳐진 공간이면서, 1973년 미국의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무려 50만명의 한국 기독교인들을 대상으로 집회를 가졌던 공간으로 소환된다.
하지만 작가와의 대화에서 내가 강조했듯이, 이러한 설명을 구두로나 설명으로 접 하지 않은 채 이 작업이 여의도를 다룬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 하다. 이는 서두에서 환기했던 것처럼 그것이 ‘장소’이건 ‘공간’이건 ‘풍화’라는 자 연적 현상의 결과이건 ‘정치적 억압’의 결과이건, ‘탈장소’화되고 ‘탈역사화’되어온 각각의‘시공간(time-space)’과 그것을 스쳐간 역사의 흔적들을 단순히 ‘장소화’하거나 ‘역사화’하려는 성마른 유혹으로부터 작가가 유지해온 일종의 금욕적인 태도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한 선택이 수반할 수밖에 없는 추상성과의 간극은, 작가가 앞으로 맺어나 갈 “타협의 유토피아”가 어떤 곳에서 벌어질지(take place)에 대한 우리의 궁금증을 더욱 강화할 것이다.
1) 하르트무트 로자, 『소외와 가속: 후기 근대 시간성 비판』, 김태희 옮김, 앨피, 2021, 12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