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수집자”展, 장영원 <테세락의 정원>시리즈
정원으로 가는 암호 Z
“시간수집자”展, 장영원 <테세락의 정원>시리즈
정원으로 가는 암호 Z
김소원 (독립비평)
# 정원으로 가는 암호 Z
<테세락의 정원>에는 무명의 풀 한 포기조차 없다. ‘테세락(Tesseract)’, 즉 4차원의 초 입방체라는 물리학의 개념에 ‘정원’이라는 낭만적 개념이 더해졌지만, 흔히 떠올릴 법한 안락함은 어디에도 없다. 이 정원의 표지판들은 ‘나열된 좌표’, ‘강요된 적응’, ‘희미한 교차’다. 설치와 영상 작업들로 구성된 <테세락의 정원> 시리즈의 부제(Sub-title)들은 계속해서 무언가를 찾고 있는 불편한 여정을 드러내는 어느 지점에 서있다. 알고 보면 <테세락의 정원>은 낭만에 낭만을 더한 곳이다. 테세락은 과학적 가설에 기초한 개념이지만 정작 장영원이 테세락의 구조를 만들기 위해 시간의 Y축과 공간의 X축 위에 보태놓은 또 하나의 축 Z는 한 개인의 ‘기억과 경험’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4차원의 입방체 테세락이 소환되어 온 이유조차도 실은 낭만적이라는 반전은, 불안하고 황량해 보이는 이 정원의 풍경을 더욱 의아하게 만든다.
‘관계’와 ‘기억’이라는 테마는 그에게 있어 지속적인 작업의 뿌리다. 하지만 그 기억들이 그에게 그저 행복한 도반(道伴)만은 아닌 듯 하다. 회화에 매진하면서 그가 줄곧 다뤄왔던 관계와 기억의 테마들은 욕망의 결핍에서 나온 산물들로 해석되어 왔기 때문이다. 주로 파편화된 인체조각들을 다양한 심볼들과 이어 붙인 몽타주로 말이다. 몽타주기법이 편집과정을 통해 자신의 필요 욕구를 들여다보게 만들며, 재창조된 결과물을 통해 결핍을 얼마만큼 충족시키는 기능을 하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번 작업들은 어떠한가? ‘지금 여기의 나’에게 소환해 오는 과거의 기억들은 통상, 과학적 시간을 넘어서 4차원을 넘나드는 모험 가득한 개방성을 갖지만, 그가 구현해낸 기억의 형상들은 이런 기대감을 단호하게 배신한다. 자폐적인 자가운동, 강요된 규칙 속의 무기력한 인간,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사이공간 등이 우리를 기다리는 정원의 풍경이다. 슬쩍 발을 들여놓건 그냥 지나치건 오롯이 우리의 선택이다.
#1-1 기억으로 구축된 4차원 아날로그
: <테세락의 정원: 나열된 좌표>(2015_쇠, 나무, 모터, 강선 외 7개의 가변 설치물, 800 x 800 x 360cm)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어둠 속에서 단 두 개의 조명을 받고 있는 무채색의 기계장치들이다. 금속과 목재, 기타 산업재료의 조합체들이 하얀 사각 판 위에 띄엄띄엄 놓여있는 <나열된 좌표>에 새빨간 유혹 따위는 없다. 동공이 극도로 커지거나, 입 꼬리가 올라간다거나, 대뇌운동이 극도로 활성화 되는 일들과는 거리가 다소 먼 세계다. 크고 현란한 움직임은 없으며 귀를 기울이지 않는 한 사운드도 들리지 않는다. 씹어 삼키기도 전에 수저를 들이밀 듯 신상품을 쏟아내는 SPA 브랜드들처럼, 예술가도, 작품도, 전시회도 공포에 가까울 만큼 공급과잉인 시대다. 그만큼 선택과 폐기는 무정하고 재빠르게 이뤄진다. 이 앞을 그냥 스쳐 지나거나 돌아 선다 해도 막아 설 수 없다. 그러나 압도적인 스케일이나 사운드, 현란한 망막적 효과도 없는 이 기계장치는 어느새 우리의 발목을 잡아 묶고, 쭈그려 앉아 응시하게 만든다. 그 힘에 관해 대차게 묻지 않을 수 없다.
무덤덤해 보이는 정경을 깨고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기둥에 달려 회전하는 두 장의 하얀 천이다. 정 중앙에 세워진 3.6미터 철 기둥에 연결된 두 갈래의 강선 끝에 달린 천이다. 유일하게 흐물거리는 물성과 어둠 속에서 반사되는 색상 탓일 수도 있겠지만, 크기와 위치, 그리고 회전반경이 갖는 막대한 공간 점유율이 가장 중요한 몫을 했을 것이다. 하얀 천이 달린 중심기둥의 강선은 60초가 아닌 40초에 한 바퀴를 돌도록 고안되었다. 40초는 작가 개인이 통치하는 세계의 룰에 맞추는 시간체계요, 과거를 나타내는 숫자다. 전체 무대에서의 중심축 회전주기가 40초를 기본단위로 셋팅 됨으로써, 나머지 7개의 하위 장치들 역시 모두 과거로 편입되는 결과를 낳는다. 그의 바람대로 과거의 기억과 경험의 메타포로 기능하게 되는 하나의 월드(World)가 만들어 졌다. 결국, 현재에서 과거를 자유로이 소환하는 것을 개념적으로 정리하고 구축해 낸 셈이다.
베르그송(Henri Bergson)에 의하면 현재와 과거의 구분은 실상 불가능하다. 엄밀한 의미에서 현재는 계속해서 흘러가기 때문에 점에 불과하며 과거로 응축되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현재는 과거와의 단절이 아니고 지나간 과거는 현재에 보존되는 점에서 기억과 같다고 말한다. 보통 기억은 현재의 물리적인 공간을 초월하여 등장한다. 때문에 Z축을 과거의 기억과 경험으로 설정했을 때 과거와 현재는 공존하게 되며, 경계 짓기가 무의미해지는 4차원의 테세락이 완성되는 순간을 맞게 된다. 개념적인 완성이다.
물리적인 재현을 위해 그는 자신의 경험과 기억들을 원본으로 삼았다. 시흥, 수원, 안산, 불광 등의 장소, 그리고 미성년시절부터 최근까지의 시간이 서로 짝을 이루는 사적인 기억의 레퍼런스(Reference)들이다. 좋은 학교로 배정받기 위한 위장전입, 강압적인 훈련에 굴복해야 했던 군 시절과 운동부시절, 급작스런 전세사기, 연인과의 이별과 방황, 공사소음이 끊이지 않은 경계지역에서의 생활고 등이 해당 장소와 맞물려 기억의 구축물들로 재편된다. 최종결과물인 작품은 추상화되고 압축되고 구조화되면서 네러티브(Narrative)를 직접적으로 읽어내기 어렵지만, 작가의 연보와 자서전을 뒤섞어 놓은 듯한 구조물 각각에는 섬세한 결의 운동성이 남겨져 있다.
#1-2 기계 너머 숨소리
중심기둥을 제외한 7개의 기계장치 구조물들은 모두 1초에 한번씩 쉬어가는 회전운동의 범주 안에 있다. 이처럼 회전운동으로 일괄되는 운동성은 작가 자신이 사건들을 통해 느낀 심리적인 속도감을 알고리즘(Algorithm)으로 만든 산물이다. 여기서 속도는 시간이며, 시간은 기억이다. 작가가 7개의 구조물들을 변별 짓는 가장 큰 요소를 속도에 둔 것은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속도로 프레이밍 된 이들의 운동을 세세히 관찰해 보면 ‘아날로그 감성의 과학화’라 불러도 무방하다. 혹은 ‘과학의 아날로그 감성화’라 해도 좋다. 이 둘은 서로가 서로를 연모하며 끝없이 순환한다. 무언가를 쓰담 듯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추, 혼자 주춤대며 회전하는 원형 판, 소고 표면을 긁으며 스치는 뾰족한 막대 등을 보면 마치 감정을 품은 생명체처럼 처리되었다. 작가 스스로 이들을 ‘위로’, ‘반복운동’, ‘각의 걸음’, ‘끌려 다님’, ‘나부낌’, ’채찍’, ‘긁힘’ 등으로 호명하고, 그 지점에서 고안된 운동성이라는 것은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이런 장치들은 애처로움, 비애, 유머 등 다양한 감정을 유발시킨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기하학적 형태의 기계장치들이 만들어내는 풍경이 쓸쓸하고 황량한 이유는 외부에 의해 심겨진 규칙에 따라 자폐적인 자가운동을 무한 반복하는데 있다. 이들은 모두 하나의 판 위에 올려져 있지만 그 어떤 다른 구조물과도 상호관계를 맺지 않는다. 외부세계와 철저히 단절한 채 스스로의 임무에만 몰입한다. 이런 단절과 자폐적 성향은 작가 자신에겐 고통스러운 기억의 잔재일수 있고, 다른 관람자들에게 다양한 투사의 촉발요인일 수 있다. 숨겨진 다양한 텍스트들을 직접적으로 읽을 수는 없지만, 이처럼 구조물의 운동패턴 안에 살아있는 정서적 흔적들은 관람자 스스로가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 내도록 감정적인 터치를 불러일으킨다. 수산물 시장에서 본 파리 쫓는 기계에서 본 설치작품의 첫 아이디어를 얻었던 장영원은 수산물을 보호하기 위해 돌아가는 기계가 다른 대상의 접근을 금지하는 배타적인 기능에 주목했다. 이런 점에서 <나열된 좌표>는 외부인의 접근은 물론 내부세계 안에서도 접근금지명령을 내리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심각해지려는 순간 바람을 빼는 듯 나타나는 기계들의 우스꽝스러운 동작들은 과연 혼자만의 오해일까?
한편, 물리적인 운동성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이 기계장치들을 키네틱 아트(Kinetic art)로 부르기에 전혀 무리가 없다. 그러나 운동성 그 자체나 기계 미학을 건조하게 실현하는 종류와 예술적 본질을 추구하는 방편으로 기계장치를 활용하는 종류는 분명히 구분되어야 하며, 장영원의 작업은 후자로 불러야 옳을 것이다. 기계의 운동이 테크닉이나 망막적 자극에 치우치지 않고 섬세한 감정의 결이 되고 그로 인해 관람자에게 제2, 제3의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지점은 이 작품의 매력이자 중요한 핵심이다. 이런 점은 모터나 착시현상을 이용하는 로우테크놀로지 아트(Low-technology art)의 특징이기도 하다. 로우테크는 기술을 사용하기는 하지만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술의 본질은 전혀 기술적인 것이 아니며, 예술은 기술의 본질에 가까우면서도 한편 그것과 다른 어떤 영역의 것이라고 말한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생각과 일치하는 대목이다. 이것은 또한 예술이 기술을 위한 기술을 지향하는 움직임들에 대한 경계의 한 목소리도 될 것이다.
# 2 규칙 속의 무기력한 인간
: <테세락의 정원: 강요된 적응>(2015, 19분50초, 1채널비디오, 공사장각재와 쇠로 만든 평형대 350x 80cm)
매체와 형식을 달리하면서 같은 주제에 골몰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간 회화매체에 매진해온 장영원의 경우, 같은 회화매체라 할지라도 그 안에서 다양한 조형방식을 시도해 왔고 이는 고무적이 일이다. 설치와 영상들로 채워진 이번 신작들은 그가 새롭게 시도하는 매체이지만, 지금껏 깊게 관심을 가져온 주제와 주제를 다루는 심리적 태도 면에서 놀라울 만큼 일관된다. 과거 회화작품에서 배우를 섭외하고 연극적 상황을 연출했다면, 이번 <강요된 적응>도 여러 지방에서 상경한 출연진을 섭외하고 연출을 시도했다. 이전과 차이가 있다면 이번에는 일종의 게임제안자로서의 역할이 강하다는 점이다. 하지만 시나리오와 게임 룰은 본질적으로 현실과 유리된 상황 속에 들어가야 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강요된 적응> 영상은 안전장비가 미흡한 환경에서 마치 곡예를 하듯 일하는 건설현장 노동자에 관한 TV프로그램을 시청하면서 힌트를 얻은 작업이다. 장영원은 지방에서 서울로 이주해 살고 있는 20~30대 남녀 다섯 명에게 평균대 위를 걸을 때 수행해야 할 게임의 법칙을 알려주고 실행하도록 하면서 그것을 촬영했다. 이 영상은 앞서 언급했던 작품<나열된 좌표>와 근본적으로 동일한 매커니즘을 지닌다. <나열된 좌표들>는 작가에 의해 미리 고안된 속도의 알고리즘에 의해 끊임없이 동일한 동작을 반복해야 하는 구조다. <강요된 적응>도 마찬가지로 참여자들이 제한된 시간과 룰 안에서 장영원작가의 지시에 따라야 한다. 그저 기계가 사람으로 바뀌었을 뿐, 테세락의 정원 시리즈에는 정해진 규칙에 의해 움직이는 강제적 수용과 무기력한 순응이 공통적으로 내포되어 있는 셈이다. 작가는 평균대에서 떨어지면 안 된다는 지시를 하지 않았지만 참여자 대부분 스스로가 안간힘을 쓰면서 주어진 규칙을 더 억압적으로 내면화시키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잘하려고 할수록 경직되고 더 많은 실수를 하게 되는 출연자들의 모습은 웃음을 유발한다. 자칫 과도히 심각해 질 수 있는 이 주제를 유머코드와 섞어놓았다.
#3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사이공간(In-between space)’
<테세락의 정원: 희미한 교차>(2015, 5분30초, 1채널 비디오)
또 하나의 영상작품 <희미한 교차>는 설치작품 <나열된 좌표>와 마찬가지로 부조리한 상황과 관련된 과거의 경험을 소재로 제작된 작품이다. 서울과 경기도를 넘나들며 2년마다 이사를 다니던 와중 도로경계표지판을 관찰하게 되었던 장영원은 행정구역의 경계지점에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사이공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잦은 이사로 인한 변화가 불안정한 삶을 강화시킨다는 점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터라, 사이공간의 발견은 그에게 큰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오랜 동안 한 곳에 정주하지 못하고 소속되지 못하는 삶 속에서 만난 사이공간은 공통분모를 지닌 반가운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가 거리측정기를 들고 안산지역에서 출발하여 서울과 고양시까지의 경계 구간을 돌며 찍은 영상들은 도로경계표지판, 거리측정기, 도로전경 이렇게 총 3가지 대상으로 나뉘어 별도의 카메라로 촬영되었다. 로드무비 형식으로 촬영된 이 작품은 모순된 상황에 대한 현장다큐와 같은 작품이다. 경계지역은 실제로 대부분은 차를 이용해서 지나게 되는 곳들이고 우리가 흔히 관찰하게 되는 광경이 아니기 때문에 1차적으로 낯선 느낌을 준다. 사실, 제도권의 관할 영역에서 벗어난 대상은 쓸모 없는 곳으로 치부되지만, 또 한편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는 곳이 되기도 한다. 이런 이중적인 맥락을 잘 활용하여 차후에 다른 종류의 예술적 시도나 시리즈를 기대해 볼 수 있겠다.
#정원은 이제 폐쇄합니다.
테세락의 정원은 작가 장영원이 구축한 하나의 세계다. 각각의 구성요소들이 일정한 규칙과 위계적 시스템에 의해 움직이는 세계. 유토피아와는 거리가 먼, 어딘가가 뒤틀려있고 불편한 세계다. 기억과 경험을 소환해오는 것에서 기대해 보았던 낭만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그가 불러들인 과거의 기억과 경험들은 엄격한 규율, 억압, 복종, 일방적인 순응 등이 뒤섞인 고통스러운 회색 빛이다. 그리고 테세락의 정원에는 마치 쌍둥이처럼 그것들을 똑같이 심어놓았다. 예술이라는 안전지대에서 스토리텔러, 건축가, 연출가, 과학자이라는 갖가지 페르소나를 가지고 말이다. 본질은 같으나 단지 다른 옷과 모자를 쓴 것처럼 외형만이 메타포를 통해 추상화되었을 뿐인 정원. 기계장치들이 만들어낸 황량한 이 기억의 정원은 곧 닫힐 것이다.
미야자와 겐지의 원작에서 영감을 얻은 ‘은하철도 999’에는 기계인간이 되기로 선택한 인간들이 나온다. 그들의 목적은 영생불멸이지만, 이것은 죽음을 택한 역설로 남는다. 죽지 않는 유일한 것은 이미 죽어있는 것 뿐이다. 생명은 죽음을 전제로 한다. 고장난 심장들로 자폐적인 운동을 반복하는 기계장치들의 정원은 폐쇄되기를 바란다. 말초부위들이 애처로이 꿈틀대던 기계장치들이 부디 숨을 거두기 바란다.